2017 홍콩순복음교회 성경통독” 216일차(9월 9일, 토)
통독범위 에스겔 16-18장
“우리는 예수님만 자랑합니다!”
16장
굉장히 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음녀에 비유됩니다. 하나님은 들판에 버려진 여자아이와 같은 예루살렘을 거두셨습니다. 그 여자아이를 정성스럽게 돌보아주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장성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왕비처럼 그녀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음란으로 변질됩니다. 남자 우상들과 음란한 일을 저질렀으며, 자녀들을 우상숭배의 제물로 불살랐습니다. 음란함의 강도는 높아집니다.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행음합니다. 창녀들은 음란한 행위로 돈을 받지만 오히려 여인은 돈을 주어가며 음란한 행위를 벌입니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은혜에서 떠나 음란함에 있는 여인은 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인과 함께 음란을 즐기던 모든 남자들, 심지어 그녀를 미워하던 남자들도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와 소돔은 예루살렘과 자매로 비유됩니다. 그들도 역겨운 일을 행했으나 예루살렘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동생 소돔은 교만하여서 배부르고 평안하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을 돌보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벌을 받았습니다. 언니 사마리아도 역겨운 일들을 더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비한다면 반도 되지 않는 범죄함입니다.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더 많은 범죄함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심판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돔과 사마리아를 회복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도 동일한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는 언니와 동생을 여인에게 동생으로 주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악한 행실을 기억하게 하고 부끄러워하게 하는 조치입니다. 여인은 지난 일들을 기억하며 다시는 입도 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17장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는 독수리 두 마리, 백향목, 포도나무가 등장하고, 포도나무의 운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주전 597년 독수리(3절) 느부갓네살은 자존심이 쎈 다윗 왕조의 높은 가지(3절) 여호야긴 왕을 장사하는 땅 바벨론(4절)에 옮겨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여호야긴의 아저씨 포도나무 시드기야를 임금으로 앉혔다(5절). 포도나무 시드기야는 자랄 수 있었으나(자기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높지 아니해야 했고 독수리의 지시를 따르고 독수리 아래에 머물러야 했습니다(6절).
또 하나의 독수리가 등장합니다. 애굽 임금입니다(7절). 시드기야는 이 애굽 임금의 편이 되어 그의 도움을 바랐으나 헛된 일입니다(8-9절). 동풍(바벨론 임금)이 불어올 때에 말라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비유를 설명하며 예루살렘이 망한 것은 시드기야가 바벨론 임금을 섬기기고 맹세하고는 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15절). 바벨론을 섬기겠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맹세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맹세를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출발이 예고됩니다(22-24절). 평화의 임금이 나와 다시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될 것입니다. 23절의 상징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 32절에서 천국의 비유에 사용하셨습니다.
18장
속담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서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됩니다. 이스라엘의 속담 가운데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이 있었습니다. 이 속담 속에는 선조들의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대의 느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18장은 철저하게 의롭게 심판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스라엘은 선조의 죄에 대해 돌이키지 않았고 그 죄를 여전히 범하였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부모 세대의 죄에 연결된 고리가 끊어질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의 사슬에서도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책임 지울 수 없듯이, 부모의 모범적인 삶을 자식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끌어올 수도 없습니다. 악으로 돌아가면 부모의 순종도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미래는 각자의 행동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통독범위 에스겔 16-18장
“우리는 예수님만 자랑합니다!”
16장
굉장히 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음녀에 비유됩니다. 하나님은 들판에 버려진 여자아이와 같은 예루살렘을 거두셨습니다. 그 여자아이를 정성스럽게 돌보아주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장성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왕비처럼 그녀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음란으로 변질됩니다. 남자 우상들과 음란한 일을 저질렀으며, 자녀들을 우상숭배의 제물로 불살랐습니다. 음란함의 강도는 높아집니다.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행음합니다. 창녀들은 음란한 행위로 돈을 받지만 오히려 여인은 돈을 주어가며 음란한 행위를 벌입니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은혜에서 떠나 음란함에 있는 여인은 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인과 함께 음란을 즐기던 모든 남자들, 심지어 그녀를 미워하던 남자들도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와 소돔은 예루살렘과 자매로 비유됩니다. 그들도 역겨운 일을 행했으나 예루살렘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동생 소돔은 교만하여서 배부르고 평안하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을 돌보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벌을 받았습니다. 언니 사마리아도 역겨운 일들을 더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비한다면 반도 되지 않는 범죄함입니다.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더 많은 범죄함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심판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돔과 사마리아를 회복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도 동일한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는 언니와 동생을 여인에게 동생으로 주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악한 행실을 기억하게 하고 부끄러워하게 하는 조치입니다. 여인은 지난 일들을 기억하며 다시는 입도 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17장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는 독수리 두 마리, 백향목, 포도나무가 등장하고, 포도나무의 운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주전 597년 독수리(3절) 느부갓네살은 자존심이 쎈 다윗 왕조의 높은 가지(3절) 여호야긴 왕을 장사하는 땅 바벨론(4절)에 옮겨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여호야긴의 아저씨 포도나무 시드기야를 임금으로 앉혔다(5절). 포도나무 시드기야는 자랄 수 있었으나(자기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높지 아니해야 했고 독수리의 지시를 따르고 독수리 아래에 머물러야 했습니다(6절).
또 하나의 독수리가 등장합니다. 애굽 임금입니다(7절). 시드기야는 이 애굽 임금의 편이 되어 그의 도움을 바랐으나 헛된 일입니다(8-9절). 동풍(바벨론 임금)이 불어올 때에 말라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비유를 설명하며 예루살렘이 망한 것은 시드기야가 바벨론 임금을 섬기기고 맹세하고는 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15절). 바벨론을 섬기겠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맹세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맹세를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출발이 예고됩니다(22-24절). 평화의 임금이 나와 다시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될 것입니다. 23절의 상징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 32절에서 천국의 비유에 사용하셨습니다.
18장
속담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서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됩니다. 이스라엘의 속담 가운데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이 있었습니다. 이 속담 속에는 선조들의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대의 느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18장은 철저하게 의롭게 심판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스라엘은 선조의 죄에 대해 돌이키지 않았고 그 죄를 여전히 범하였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부모 세대의 죄에 연결된 고리가 끊어질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의 사슬에서도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책임 지울 수 없듯이, 부모의 모범적인 삶을 자식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끌어올 수도 없습니다. 악으로 돌아가면 부모의 순종도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미래는 각자의 행동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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